투자자 제시 리버모어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제시 리버모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투자자에 항상 거론되는 인물로서 많은 기술적 분석을 정립한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을 되짚어보면서 올바른 투자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개요 

출생 1877.7.26  사망 1940.11.28 

미국의 주식 투자자 (더 정확히는 공매도 단타를 한 투기자)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정확한 재무재표가 공개되지 않아 주식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발로 직접 뛰었고 

시장 조작이 횡횡하던 시대에 리버모어는 현재의 기술적 분석으로 알려진 방법으로 거래를 진행했습니다.  

제시 리버모어는 일부에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레이더로 간주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에서는 일관된 수익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 아니라 큰 이익을 추구하는 레버리지 투자라는 점에서 개인 투자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투자법이라며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시 리버모어는 매사추세츠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3살 즈음부터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14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장일을 돕게 하려고 자퇴시켰는데, 자식의 뛰어난 두뇌를 아깝게 여긴 어머니의 도움으로 출가를 했다. 

 

 

경력 

14세  보스턴에서 주에 5달러의 벌이로 주식 중개 지점의 주식 시세를 게시하는 보이보이로 고용되었습니다. 

그는 벌링턴 주식 5주를 5달러에 매수하면서 첫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16~17세 보스턴 주식 상점에서 거래하면서 급여보다 훨씬 많은 주당 약 200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전업 트레이더로 풀타임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일을 도박이라며 반대하던 어머니에게 1000달러를 가져다 드리고 "도박이 아니라 추측에 의한 투자"라며 반박했습니다. 

 

18세~19세 그는 1만 달러의 거래 이익을 축적했으며, 3년간의 거래에서 거의 1000%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의 일관된 투자 수익으로 인해 보스턴 지역 주식 중개 지점에서 출입금지를 당합니다. 

 

21세~22세 보스턴에서 출입을 허용하던 마지막 주식 상점인 Haight & Freese에서 거래를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하이앤드프리즈는 제한적인 거래 요건을 부과해 리버모어가 돈을 벌기가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23세 뉴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마침 그때는 강력한 주식 강세장이었습니다. 

그는 주식 중개인으로 거래에 성공해 5일 만에 1만 달러를 5만 달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장의 조정을 예상하고 400%의 마진을 남기는 것으로 매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현재와 같이 매도. 매수가 즉각적으로 반영되지 않았고 (당시는 컴퓨터나 모바일이 아니라 시세테이프) 그 때문에 그는 전체 지분을 잃었습니다. 

그 후 그는 에드 허튼에게 2천 달러를 빌려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습니다. 

 

24세 북태평양 철도 주식을 매입했습니다. 그는 1만 달러로 50만 달러까지 만들었습니다. 

 

29세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휴가 중 토마스 W. 로슨의 조언으로 대지진 전날 유니온 퍼시픽 철도 지분의 대부분을 매도하여 25만 달러의 이익을 올렸습니다. 

반대로 얼마 후 그의 친구이자 그가 거래 대부분을 하던 중개 회사의 소유주인 에드워드 프랜시스 허튼이 매도하라 설득했고 그는 이 거래에서 4만 달러를 손해 보았습니다. 

 

30세 1907년 발생한 미국 은행 공황 상황에서 리버모어는 막대한 공매도로 하루 만에 100만 달러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폭락 당시 뉴욕증권거래소 전체를 구제했던 그의 멘토 J.P 모건은 그에게 추가 공매도를 자체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리버모어는 거기에 동의했고 그에 따른 주식상승에서 또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자산은 300만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그는 그렇게 얻은 자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요트, 철도, 차량, 부동산 등을 구입했고 여러 명의 정부도 거느렸습니다. 

얼마 안 가 파산 신청을 하게 됩니다. 

 

31세 그는 테디 프라이스가 면화를 사라고 했고,  그 덕에 파산했지만 모든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38세 그는 다시 파산했습니다. 

 

47세~48세 그는 시장 조작에 참여하여 밀과 옥수수를 거래하여 100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52세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숨기기 위해 100명 이상의 주식 중개인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공매도를 진행합니다.  1929년 경제대공황 당시 그는 약 1억 달러를 벌었들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매도에 대한 비난과 살해위협을 받아  무장 경호원을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55세 두 번째 이혼. 

 

57세 미국 증권 거래 위원회의 설립으로 리버모어의 거래에 악영향을 미치는 규칙이 생겨났고 

결국 전재산을 잃고 세 번째 파산을 신청하게 됩니다. 또 시카고 무역 위원회 위원 자격도 정지됩니다. 

 

58세 아내에 의해 아들의 총격 사건이 발생하고, 러시아 정부의 소송으로 리버모어는 정신적으로 건강이 악화됩니다. 

 

60세 그는 80만 달러의 청구된 세금을 갚습니다. 

 

61세 그의 기술 분석 시스템을 판매하는 재무 자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62세 리버모어는 평소 칵테일을 마시던 호텔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전 부인에게 8장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나의 견해 

제시 리버모어는 우리가 흔히 주식투자에 흔히 적용하는 기술적 분석이란 유산을 남긴 투자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화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2시간짜리 영화가 아닙니다. 

스릴 있고 스펙터클한 것도 좋지만 인생의 긴 여정은 안정적인 것도 중요합니다.  

투자자로서의 배짱은 대단하다 느끼지만 인간 제시 리버모어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을 거 같습니다. 

 

이상으로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에 대해 공부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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